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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이야기/재미있는 돈 이야기

[화제]어느 의사선생님의 ‘별난 외도’

by 금빛화폐연구소 2007. 4. 1.

정태섭 박사가 X-레이로 촬영한 가족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울릉도, 지리산 등 시골 어린이들에게 과학잡지 ‘뉴턴’ 을 8년간 보내준 정박사가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으며 흐뭇해하고 있다.

 

 

영동세브란스병원 정태섭 박사, 고물수집가·천체관측가·사진가·발명가로 즐거운 인생



서울 강남에 위치한 영동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옛 진단방사선과) 정태섭 박사(53)의 연구실은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현미경, 천체망원경, X-레이 튜브, 솜사탕 만드는 기계, 피에로 의상, 헬륨풍선 등 온갖 기구와 소품이 연구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 현미경과 X-레이 튜브는 모두 1700~1800년대 만들어진 진귀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의 얼굴이 담긴 10만원권 지폐가 걸려 있다. 그 옆에는 가족사진이 있다. 그런데 액자 속에 담긴 사진의 절반은 해골 4구다.

영상의학과 교수답게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X-레이로 촬영해 담은 것이다. 그가 왜 ‘괴짜박사’로 통하는지 그의 연구실이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이는 그를 영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의 브라운 박사에 빗대기도 한다.

연구실에 희귀물건 가득 차

이처럼 정 박사는 의사이면서 고물(古物) 수집가이다. 또 천체관측가이자 사진작가이다. 발명가이기도 하다. 특허를 받은 것만도 3종이다. 실험용 모형혈관과 휴대용 영상 기기 삼각대, 자동차를 힘 안들이고 밀 수 있는 지렛대형 주차 보조 장치 등이다. 1인 다역(多役), 1인 다취(多趣)한 인물이다.

“현미경과 X-레이 튜브는 의료용 기구예요. 다 역사가 있지요. 젊은 의사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요. 여기 이 기구로는 1895년 11월 뢴트겐 선생이 X-광선을 처음 발견할 때 직접 실험하던 광경을 재현해 보여줄 수 있어요. 또 이 크룩스튜브는 크룩스라는 사람이 80년 전 만든 건데 X-레이 튜브의 원조예요. 보세요. 빛이 들어오죠? X-레이가 의료용으로 활용되기 전에는 부자들이 파티할 때 장식용으로 이용했다고 해요.”

정 박사는 기구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즐거워했다. “또 다른 것도 보여드릴까요?” 하며 자신의 애장품들을 하나씩 꺼내보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애지중지하는 장난감들을 친구에게 자랑해 보이듯 그의 표정은 달떠 있다. 세월은 그의 육신을 중년에 이르게 했지만 변함없는 동심(童心)만은 해쳐 놓지 못한 듯했다. 이는 오늘날 그가 이 많은 물건을 수집하고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하게끔 한 동력이 됐을 것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 전학을 왔어요.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바람에 친구가 없어 외톨이였지요.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경복중학교, 경기중학교와 함께 우리 학교가 폐교하게 됐어요. 그 대가로 이 학교 학생은 고교를 무시험으로 진학할 수 있는 혜택을 줬지요. 시험부담이 없어지면서 전 중·고등학생 시절 6년간 청계천을 돌아다니며 부속품을 사서 TV, 전축, 망원경 등을 만들었어요. 아버님이 과학교사여서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기계 조립하는 건 자신 있었거든요. 한국화폐를 수집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에요. 헌책방을 자주 갔는데 아저씨들이 시골에서 리어카로 싣고 온 온갖 서적 속에 옛날 지폐 등 희귀한 것들이 섞여 오곤 했거든요.”

화폐경매를 할 때 단골로 초청되는 100인 중 한 사람으로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가 포함될 정도로 그는 한국화폐를 많이 모았다. 매번 구입비는 TV나 전축 등을 만들어 판 돈으로 조달했다. 이 같은 화폐사랑이 화폐에 과학자의 얼굴을 넣자는 운동을 벌이게 한 계기가 됐다. 그의 연구실에 걸린 장영실 얼굴이 들어간 10만원권 화폐는 그 운동의 일환으로 그가 시험 제작해본 것이다. 정 박사는 “옛날 물품을 사들이는 것은 그때 생긴 버릇”이라며 “지금도 틈나면 황학동 등에 가서 다이얼전화기, 괘종시계 등 오래된 물건을 수집한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실에 있는 1700~1800년대 현미경 등은 크리스티 경매 등을 통해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소아환자 위한 천체관측회 열어

그는 10여 년 전부터 영동세브란스병원의 ‘별밤지기’이기도 하다. 입원한 소아환자들에게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여줌으로써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던 어느 날 나의 삶이 너무 황폐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로웠고요. 그래서 천체망원경을 병원에 가져다 놓고 별을 보기 시작했어요. 문득 어린이환자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게 12년 전 일이에요.”

그해부터 매년 봄 또는 가을에 영동세브란스병원 야외주차장에서는 병원 소아환자들과 지역학교 학생들, 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한 천체관측회가 열리고 있다. 500여 명이 운집하는 바람에 천체망원경 하나로는 역부족이었는데 이화여대 천체관측동아리 ‘폴라리스’가 도움을 줘 모두 10개의 천체망원경이 행사 때마다 준비된다. 정 박사의 연구실에 보관해둔 피에로 복장과 헬륨풍선 등은 모두 천체관측회 때 사용하는 것들이다. 봄이나 가을에 행사를 여는 이유는 목성과 토성이 잘 보이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올 행사는 4월 6일 오후 7시부터 열린다.

정 박사의 어린이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지난 8년간 울릉도, 지리산 등 모두 11곳의 시골 어린이에게 월간 과학잡지 ‘뉴턴’을 보냈다. ‘뉴턴’을 발행하는 뉴턴사이언스의 도움으로 반품된 잡지 400여 권을 매달 기증받아 자비를 들여 8년간 빠짐없이 우편으로 발송한 것이다. 아이들로부터 코 묻은 감사의 편지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4개월 전부터 잡지사의 사정으로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정 박사는 “사춘기 이전에 과학적인 자극을 얼마나 주느냐가 아이들의 사고체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며 “교육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시골 아이들에게 조금의 보탬이라도 됐던 일을 못 하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작가로도 데뷔했다. 서울 갤러리정의 계간 ‘뷰즈’ 창간기념전인 ‘상상展’에 그의 작품 5점이 전시중이다. 사물을 X-레이로 촬영한 작품들이다. 고(故) 기형도 시인의 시 ‘입속의 검은 잎’을 방사선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비롯해 ‘청포도’ ‘장미의 배반’ 등이다.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화랑을 찾아다녔어요.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죠. 유일하게 갤러리정 관장이 제 작품에 관심을 보였어요. 갤러리정의 도움으로 3월 1일부터 5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2007 아트엑스포에서도 ‘청포도’와 ‘장미의 배반’을 소개했어요.”

그의 바람은 ‘즐겁게 늙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패스트푸드점 KFC 앞의 할아버지 조형물처럼 어린이에게 늘 넉넉한 웃음을 전해주는 ‘재미있는’ 선생님이 그가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다.